미연시.


이 단어는 내 인생과 뗄레야 뗄 수가 없는, 내 인생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이 게임장르는 2000년대 오타쿠 문화를 논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말이며


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원인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먼저 접한 미연시는 중학교 2학년인가에 접했던 셔플! 한글패치 버전이었다.


당시 스즈미야 하루히로 입덕해서 주로 라노벨쪽과 애니를 파던 씹덕 유망주였던 나는


셔플! 애니판을 보게 되었고, 찬란하게 빛나는 히로인들의 매력에 빠져 셔플!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찾던 중, 원작은 미연시이며 국내에서 한글패치 버전이 존재한다는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가히 충격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만큼의 거대한 감동과도 같은 무언가를 내게 안겨 주었다.


지금까지는 라노베, 애니와 같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매체의 컨텐츠만 소모하던 내게,


내가 직접 주인공이 되어서 선택지를 골라 원하는 엔딩으로 나아가는 방식의 미연시는 애니, 라노벨로는 얻을 수 없었던 몰입감을 주었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닥 모날데 없이 평범하기 짝이없던 셔플!의 스토리도 매우 즐겁게 플레이 할 수 있었다.


내가 한창 미연시에 빠질 당시는 귀작, 취작 등으로 유명한 elf사에서 세대이동이 일어난 2000년대 초반으로,



하얀 마약이라 불리던 화이트 앨범과



분홍 마약으로 불리던 그것은 흩날리는 벚꽃처럼 (소레치루)가 양대 마약으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던 시기였고



정통파 학원물 하면 리프사의 투하트2



나키게 (슬픈 장르)라고 한다면 카논



전기물, 배틀물이라고 하면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등등


벌써 10년이 훨씬 더 넘은 세월동안 여전히 회자되며, 심심하면 리메이크도 나오는 기라성처럼 빛나는 수많은 명작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이 외에도 아오조라, 파르페, 크로스 채널, 둥지짓는 드래곤, 사야의 노래, 120엔의 계절 등등


하루가 멀다하고 명작이 쏟아져나왔고, 미연시라는 장르는 당시 마이너한 오타쿠 문화에서는 메이저한 장르였다.



이 미연시는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줬는데,


우선 한국말도 잘 못하는 빡대가리 중딩때부터 셔플! 라디오 CD를 듣고싶다는 일념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게 해서


현재도 내가 일본에서 잘 먹고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숨은 붙여놓게 해 주었고


더 나아가서 센스 오프라는 미연시의 수학 천재 주인공에게 영향을 받아


당시 문과 과목보다도 현저히 점수가 안 나오는 이과쪽으로 강제로 진학하게 되어서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아주 중요한 선택지를 고르게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일주일동안 공부에 찌들어서 피폐해지던 내 마음을 달래준건 매주 일요일마다 조금씩 플레이하던 수많은 미연시들이었다.


하여튼 나는 미연시를 매우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는 있고,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와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명작 미연시라는 단어를 살면서 듣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본의 사단법인, 컴퓨터 소프트웨어 윤리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PC판 미연시 시장은 계속해서 하락세에 있다.


2000년에만 해도 550억엔에 육박하던 그 시장규모는 15년이라는 세월동안 반의 반 정도로 축소되었고,


그 하락세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러한 시장규모 하락세의 원인으로는 불법 다운로드, 경제불황, 신규 컨텐츠 제작자의 감소등이 꼽히고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불법 다운로드 등의 영향도 있겠지만, 현재 미연시 시작의 쇠퇴의 원인은 간단하다.


바로 플레이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미연시 장르가 오타쿠의 메이져 문화로 빛나던 그 시절,


오타쿠들이 향유할 수 있는 오타쿠 문화로는 대표적으로 만화, 라노벨, 애니, 미연시 등이 존재했고,


그중에서 능동적으로 자신이 세계관의 주인공이 되어서 그 세계를 즐길 수 있는 컨텐츠는 미연시가 유일했다.


귀여운 미소녀들과의 만남, 두근거리는 스토리, 내가 능동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선택지 등등


거기에 더불어 음악+그림+글 이라는 수많은 요소의 집합체인 미연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요, 예술이었다.



하지만 미소녀들과의 교류라는 장점은, 이후에 나오는 수많은 게임들에게 빼앗겨 버려서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 플레이한다는 장점 마저도 모바일 게임에게 빼앗겨 버렸다.


거기에 플레이를 위해서는 꼼짝없이 짧으면 2,3시간에서 길게는 10, 20시간동안 컴퓨터 앞에 묶여있어야만 하는 미연시와는 달리


모바일 게임은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플레이가 가능했고,


가장 큰 차이로는 미연시는 '유료' 모바일 게임은 '무료'이기 때문에 접근성 자체가 너무나도 달랐다.



더불어 게임 시장 자체의 트렌드가 PC 게임에서 모바일 게임으로 넘어가면서,


발빠른 회사들은 자사의 ip를 이용해 모바일 게임 시장에 뛰어들었고,


이러한 회사들이 기존 미연시 시장에서 발을 빼면서 자연스레 대작, 명작 타이틀은 줄고, 인재는 유출되고, 그렇게 미연시 시장은 쇠퇴하였다.


작아진 시장에서 미연시 제작 회사들은 그 끝을 맞이하거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밖에는 없었는데...